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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맛이 끓어오르는 밤, 구례 북문토종흑돼지

돌싱닷컴(dolxing.com)에서 옮겨 온 글입니다. 원문 보기

[붉은 맛이 끓어오르는 밤, 구례 북문토종흑돼지]

해가 기울고, 골목 끝 작은 대폿집 앞에는 저녁 공기가 은근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그네는 연곡사 답사 후 구례읍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구례 하나로마트 정류장에 내린다.

큰길을 따라 걷다가 구례경찰서 앞 회전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내려간다.

5분 남짓 걸으면 대로변 사거리 오른쪽, 낡은 단층 건물이 보인다.

빛 바랜 간판 위 ‘북문토종흑돼지’와 돼지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구례 1년살이 중인 친구가 잡은 저녁 약속 장소다.

지금은 구례병원 인근으로 확장 이전했다.

더 깔끔하고 정돈된 공간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 두어 번 들렀던 곳이다. 주인 할머니의 손맛과 사람 냄새를 알고 있다.

6시가 가까워진 시간, 식당 앞에서 친구를 만나 안으로 들어선다.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주인 할머니가 손님을 맞는다.

친구와 미리 이야기해 둔 양념주물럭과 소주를 주문한다.

잠시 뒤, 하얀 비닐이 깔린 식탁 위에 휴대용 버너가 올라오고 불이 붙는다.

그 위로 검고 깊은 냄비가 놓인다.

안에는 붉은 양념의 돼지주물럭, 그 위로 대파와 콩나물이 수북하게 얹혀 있다.

남도 묵은김치와 된장, 마늘, 고추, 애호박무침, 콩나물무침, 상추까지.

수수하지만 정겨운 밑반찬이 이어진다.

제철 재료로 아침마다 직접 만든다고 한다.

그래서 반찬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셀프바에서 더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구조다.

불 위에서 시간이 끓기 시작한다.

대파와 콩나물을 뒤섞어 졸이면, 익어가는 속도만큼 이야기가 느려진다.

잔이 부딪히고, 한 모금이 넘어간다.

그 사이 냄비에서는 하얀 김이 숨을 몰아쉬듯 올라온다.

남원 운봉에서 가져온 흑돼지와 양파, 채소들이 양념 속에서 천천히 어우러진다.

소주 한 잔이 비워지고, 또 채워진다.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올린다.

도톰한 질감이 젓가락 끝으로 먼저 전해진다.

입안에서는 살코기와 비계, 콩나물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씹힌다.

자극적이지 않은 빨간 양념 위로 채소의 단맛, 고기의 감칠맛이 겹쳐진다.

밥 한 공기를 추가해 볶는다.

압력밥솥에서 갓 나온 밥이 붉은 양념을 머금는다.

안주는 다시 식사가 되고, 식사는 다시 안주가 된다.

볶음밥은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천천히 식탁 위에 남는다.

소주 병이 늘어날수록 대화는 깊어진다.

냄비는 점점 비어 간다.

마지막 잔을 부딪히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계산을 마치고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한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한 블록 위, 친구 집으로 올라가는 길.

작은 슈퍼에서 담배 세 갑과 맥주 두 캔을 산다.

담배는 친구 몫, 맥주는 나그네 몫이다.

옥상에 올라 맥주를 연다.

어둠이 내려앉은 구례읍, 산 능선과 붉은 교회 십자가가 희미하게 보인다.

별은 없지만 공기는 맑다.

구례의 밤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었다.

오늘, 한 잔의 술 속에 사람과 시간이 함께 흘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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